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빈 이씨 (문단 편집) === 한 맺힌 죽음 === 《[[한중록]]》에 의하면 [[임오화변]]이 있은 직후 영빈 이씨는 손자 정조가 임금이 되는 날만을 곱씹어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왔으나 [[1764년]](영조 40년), 세손으로 하여금 [[효장세자]]의 장통(長統)을 계승하게 하겠다는 영조의 처분이 있은 직후 식음을 전폐하며 꽤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. 이후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[[1764년]](영조 40년) [[음력]] [[7월 26일]], 그녀는 먼저 간 아들을 뒤따르듯 [[경희궁 양덕당]]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.[* 절묘한 사망 시점 때문인지 자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. 만약 병사했다면 매일같이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던 [[혜경궁 홍씨]]가 간병했을 텐데 한중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, 영빈 이씨의 사망 직후 한동안 한중록이 중단됐다는 점이 그 근거. 더 나아가서 [[우울증]]이 갑작스러운 자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.] 향년 68세. >'''영빈 이씨가 연서하다''' >---- >영빈(暎嬪) '''[[전의 이씨|이씨]](李氏)'''가 [[사망|연서]](捐逝)하였다. 임금이 임곡(臨哭)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, >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. 혜빈궁(惠嬪宮)이 《의례(儀禮)》 경전에 >‘서자(庶子)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(緦麻服)을 입는다.’는 글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다. >영빈이 사도 세자]를 탄생하였는데,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. >---- >- '''《[[영조실록]]》 104권, 영조 40년([[1764년]], 청 건륭(乾隆) 29년) 7월 26일 (병자) 1번째기사''' 영조는 영빈의 죽음을 슬퍼하며,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'의열(義烈)'이라는 [[시호]]를 내렸다. 또한 손수 묘지명을 지어주었는데, 국왕이 후궁의 지문을 지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. 영빈 이씨의 청화백자 묘지명은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사위인 [[화평옹주]]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이 글씨를 썼다. 또한 영조는 사도세자와 영빈의 일을 기록한 《표의록(表義錄)》을 직접 작성하였다. >아아!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구나. >39년간 해로하였는데 지금 하나의 꿈이 되고 말았으니 >내 슬픔이 너무나 깊다. >다섯 달만 더 살았더라면 [[칠순]]이 되었을 것을, >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일이다. >---- >- 《'''어제영빈이씨묘지'''(御製暎嬪李氏墓誌)》[* [[https://www.museum.go.kr/site/main/relic/search/view?relicId=6614|#]].] 영빈의 장례 때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. 앞서 언급했듯이 세손인 정조는 법통상 [[효장세자]]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형식적으론 세손과 친모인 [[혜경궁 홍씨]]에게 영빈은 그저 [[영조|선왕]]의 일개 후궁인 관계가 되었다. 그런데 영조는 혜빈([[혜경궁 홍씨]])과 세손이 영빈의 영전에 조문할 것을 예조에서 청하지 않았다며 이 책임을 물어서 예조판서 이지억(李之億)을 파직시키고 혜빈과 세손이 조문하도록 특별히 허락했다. >'''예조 판서 이지억을 파직하고 남태제를 대신하다''' >---- >예조 판서 '''이지억(李之億)'''을 파직하고 '''남태제(南泰齊)'''를 대신하였다. >임금이 '''영빈(暎嬪)'''의 상(喪)에 '''[[혜경궁 홍씨|혜빈]]'''과 세손이 마땅히 한번 가야 한다고 여겼는데, >해조에서 계품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. >예조에서 비로소 [[발인]]하는 날 나아가 곡하게 할 것을 청하니, 임금이 허락하였다. >---- >- '''《[[영조실록]]》 104권, 영조 40년([[1764년]], 청 건륭(乾隆) 29년) 9월 7일 (병진) 1번째기사''' 묘소는 연희궁(衍禧宮) 자리[* 지금의 [[서울특별시]] [[서대문구]] [[연희동(서울)|연희동]] [[신촌]] 일대.]에 [[시호]]를 따 '''의열묘(義烈墓)'''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으며,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때 [[사도세자]]가 [[황제]]의 [[묘호]]인 '장조(莊祖)'로 재추존되자 영빈의 묘소도 '묘(墓)'에서 '원(園)'으로 승격되어 '''수경원(綏慶園)'''이라는 원호를 받고 정자각과 비각이 새로 건립되었다. 이후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대에 '소유(昭裕)'의 [[시호]]가 추증되었다. [[1969년]] [[경기도]] [[고양시]] [[서오릉]]으로 천장해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[[연세대학교]] 루스채플이 들어섰다. 천장할 때 정자각과 비각은 그대로 두고 비각 안에 있는 비석만 옮겼다. 신주는 [[칠궁]]의 하나인 '''선희궁(宣禧宮)'''[* '''금성위 박명원이 의열 영빈궁의 묘호에 관해 상소하자 이를 논의·확정하다''' - 《[[정조실록]]》 26권, 정조 12년([[1788년]], 청 건륭(乾隆) 53년) 12월 26일 (계축) 2번째기사.]에 고이 모셔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